반지의 제왕은 20세기 중반, 1차대전의 폐해가 서양 지성인들의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시절의 작품입니다. 원작자인 톨킨은 1차대전으로 서구 문명에 회의를 느끼고, 라디오도 TV도 보지 않고 혼자만의 어두운 서재에서 환타지의 대작'반지의 제왕'을 탄생시켰습니다. 때문에 영화 속에도 톨킨의 반문명적 성향은 그다지 강하지 않으면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한 인간의 공상 속에서 하나의 대륙을 창조한 이 대서사시의 구도는 선과 악의 대결이기 때문에 이 문명과 반문명의 대비는 극명해 지는 것입니다.
선과 악, 물과 불의 완벽한 대비
일정하지 않지만 악의 무리인 사우론과 그의 동지들은 어느 영화에서나 악의 세력은 그렇듯이 상당히 야성적인 것 외에, 어둠 속에서 철을 두드리고 지하깊이 파들어간 고층의 건물에 거주하며,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합니다.
선과 악의 너무나도 선명한 대비는 식상하지 않고 오히려 깊은 느낌을 전하여 주는데, 그것은 기발함보다는 악의 세력의 모습이 너무 완벽하다는데 있습니다.
영화에서 선의 힘은 물로, 악의 힘은 불로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물과 불의 대결인 것이죠. 또한 선의 색은 고결한 흰색으로 악은 공포스런 검은색으로 선명하게 이미지화 되고, 더하여 황금색과 붉은색을 각각 부색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련됨과 동서양 공히 고결함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악의 색으로 쓰인 것은 톨킨이 창조한 세계가 반문명적 의식에 의해 나왔다는 것뿐만 아니라 역시 불의 색이 붉은색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문명의 두 가지 요소는 물과 불입니다. 동시에 불과 물은 서로 상극하는 두 요소입니다. 현대 문명으로 갈수록 인간은 물에서 멀어지고 불로 다가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비단 동양 철학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문명의 에너지는 분명 불(火)의 그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철저히 서양의 신화와 신관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양에서도 악한 영적 존재를 마(魔)라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악의 모습- 특히 타오르는 사우론의 모습은 동양에서 말하는 마의 모습과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반지의 제왕이 많은 이들에게 호감과 동감을 주는 것은 이것이 픽션이면서도 너무나 리얼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맞서는 선의 힘은 아주 자연적입니다. 간달프의 탈출을 도와준 영조(靈鳥)와 나무의 정령들, 요정, 흐르는 물까지 말입니다. 특히 간달프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태초에나 나옴직한 산신령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과 힘을 모아 옛 영광과 평화를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문명, 그 너머의 세계를 찾는다
그러나 과연 현대인들이 문명의 이기가 자연의 힘에 무너지는 픽션을 보기 위해 수없이 스크린으로 몰려드는 걸까요? 반지의 제왕이 그리는 세상 속엔 작가의 시대적 배경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수천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1편 반지원정대 시작 첫장면에 무언가를 소원하는듯한 여성의 속삭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목마름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 영화 속 요정의 목소리로 자신의 외침을 대신합니다.
영화 관람객들이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인물은 잘생기고 싸움 잘하는 아라곤이 아닙니다. 작고 뒤뚱뒤뚱 걷는데다가 싸움엔 잠뱅이고 나약하고 어리석기만 한 호빗, 그중에서 인류의 고민을 대신 진 듯한 표정을 내내 짓고 있는 프로도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있습니다.
절대반지에 흔들리는 모든 인간은 물질문명 시대에 살고있는 바로 자신의 실제모습입니다. 영화 속에서 소품을 입고 그럴듯한 모습으로 나왔기에 극장에 불이 켜져도 모두들 먹다 남은 팝콘을 들고 웃으면서 상영관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스크린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면 영화가 끝나고 모두들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어둠으로부터 구원해주고 이들을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힘이 있죠. 그것은 바로 간달프와 초월적 힘을 지닌 요정들입니다.
고대에는 인간과 자연과 신은 한데 어울려 조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저버리고 인간은 영화 속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리석고 힘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 인간의 잃어버린 신성을 찾아주는 존재가 바로 간달프입니다.
간달프는 고대의 신성이 조화된 문명을 상징하는 주인공입니다. 다른 초인적인 힘을 지닌 다양한 존재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어느 순간 영화 속에서 순백의 빛으로 상징되는 영생의 문명마저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신성을 잃어버린 대신 이성과 불로 상징되는 산업문명을 택했습니다.
인류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푸른 초원에서 춤을 주고 맥주 한잔만으로 친구와 웃을 수 있는 그곳으로 말이죠.
그곳엔 요정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흰옷의 선지자가 신의 음성으로 말하는 곳. 동양의 언어로 무릉도원이라고 할까? 모든 종교는 에덴동산, 극락, 대동세계, 태청세계 등으로 신과 인간이 하나 된 세상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역사는 인류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와 버린 셈입니다. 마치 프로도가 원치않은 반지를 걸머진 것처럼 말입니다.
현대의 불의 문명에 지친 이들은 다시 자신들을 기억해 주기를 호소하는 목소리와 만납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태초의 신이 깨어나듯 신성어린 율려소리로 우리의 잊혀진 기억을 상기시킵니다.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수많은 병사들과 영웅들은 무엇을 위하여 악에 맞서는가?
그 한마디가 반지의 제왕 제목에 있다. 가장 마지막에 개봉된 3편'왕의 귀환'이 그것이다.
악의 힘, 사우론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도 왕의 품격과 혈통을 지닌 아라곤이다. 사우론은 3편에서 아라곤에 너무 집착하다가 결정적인 프로도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한다. 수많은 병사들과 성의 여인들이 목숨을 바치며 그리워하는 것은 진정한 왕이다.
인류 역사의 90% 이상이 왕정 문화다. 실제로 역사상 문명의 발전기는 왕의 힘이 약했던 시절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왕이 군림할 때 번영은 꽃을 피웠다.
원래 인류의 시원문명은 정치와 교화가 일치된 군사부 일체문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근원, 뿌리에서 여러 갈래 줄기가 뻗듯이 문명도 인류 역사가 발전하면서 정치와 종교가 각기 갈려서 혼잡하게 되어버렸습다.
반지의 제왕은 인류가 찾고 싶고 가고 싶은 문명- 그것은 영생의 문명이며, 조화의 문명이고, 신성의 문명, 자연과 하나되는 문명, 군사부일체의 문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