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예술문화

한민족 예술DNA의 비밀, 풍류의 기원은 낭가

대한K화랑 0 576

낭가(郎家)는 한국 국가 정신의 바탕을 이룬 단체로 화랑(花郞)이 그 시초라고 했는데 사실 화랑 외에도 백제의 무절(武節)과 고구려의 조의선인이 있었고, 단군~위만조선의 국자랑(國子郞)이 있었다. 

 

한국 특유의 ‘선비’는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옛날 소도 제단의 무사를 선비라 칭했다. 고구려에서는 검은 옷을 입어 조의선인이라 했고 신라에서는 화랑이라 했다. 선비는 정예 무사집단”이라고 주장한다. 선(仙)의 무리로서 선배 제도는 고구려 태조왕대에 창설돼 고구려 강성의 기반이 됐고 신라의 화랑은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배’라는 이름을 유교에 빼앗기고 조선은 무풍(武風)을 천시해 무사적 자취가 전멸했다는 것이다. 

   

신채호에 따르면, 낭가사상은 한민족의 원시종교인 수두제[蘇塗祭]신앙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단군은 단군조선의 개창과 더불어 민족적 구심점인 수두(단군)제전(祭典)을 거행하였고, 이것은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소도(蘇塗)라는 이름의 제전으로 계승되었다가,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차대왕(次大王) 대에 와서 '선배' 제도로서 국가적 차원의 정치적 제도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선배는 선인(仙人 또는 先人)의 우리말이다. 이때에 이르러 낭가사상은 한국의 주체적인 전통사상으로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화랑제도(花郞制度)는 바로 고구려 선배제도를 모체로 하여 성장 발전한 것이다. 낭가사상은 고려 중기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다가 묘청의 난 때 국풍파(國風派)가 유학파에게 패하여 몰락함으로써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화랑제도와 묘청에 대한 신채호의 태도에서 보듯이 유·불·선(仙)교 가운데 바로 선교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고 파악하고, 그는 그것을 낭가사상의 핵심으로 간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상은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과 서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나아가 일제시대 국권회복의 실천적 이념으로까지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독단적인 사료선택과 언어해석방법으로 낭가사상을 설명함으로써 그 전개에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또한 낭불사상(郎佛思想)이라 해서 낭가(郎家)와 불가(佛家)의 사상으로 낭가사상은 상고시대 이래 태양을 숭배하고 상무(尙武) 정신이 강하며 자주적인 전통을 지닌 한국민족의 토착 사상이다. 이러한 낭가의 조직은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仙人)이나 신라의 화랑제도로 발전되었다.

 

불교는 어느 곳에서나 그 곳의 전통적인 사상이나 풍속과 결합하면서 발전하는 경향이 있어 한국에서는 낭가와 결합하는 현상을 나타냈다. 신라의 화랑도나 고려의 팔관회(八關會)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낭불사상은, 한국민족의 전통적이고 주체적인 사상을 배타적이고 사대적인 유가(儒家) 사상에 대립시켜 말할 때 쓰는 말이라 하겠다. 

 

고대 제천 행사에서 비롯된 한국 고유의 전통 사상을 풍류(風流)라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멋과 운치가 있는 일이나 그렇게 즐기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진흥왕 조(條)’에 인용되어 전해지는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그 표현이 나타난다.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이 글에서 최치원은 풍류를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고 있는 한국의 고유한 전통 사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이 글에서 최치원이 말하는 풍류는 신라의 화랑도를 가리키며, 달리 풍월도(風月道)라고도 한다.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에 비로소 제도로 정착되었지만, 그 기원은 고대의 전통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진다.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 가운데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그 명칭을 고쳐 화랑(花郞)이라 했고, 설원랑(薛原娘)을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花郞國仙)의 시초이다(王又念欲興邦國 須先風月道 更下令 選良家男子有德行者 改爲花郞 始奉薛原娘爲國仙 此花郞國仙之始)”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화랑 제도가 시작되기 전에 풍류와 풍월도의 전통이 먼저 있었으며, 이를 기초로 ‘국선(國仙)’의 제도를 만든 것이 화랑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에 대해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서로 가락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즐겼는데 멀어서 못간 곳이 없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였다(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화랑의 수양 방법은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악을 숭배하던 고대의 제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구려에도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는 관직과 ‘경당(扃堂)’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전통은 꼭 신라에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

 

고조선의 화랑, 국자랑

 

신교의 낭가정신

 

국자랑은 신교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뽑은 젊은이들로서 신교의 낭가정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최초의 낭도郎徒는 환웅천황이 거느리고 온 3천 명의 문명개척단(濟世核郞)이었다. 신시 배달 이래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와 관료, 제사장, 장수가 모두 낭가郎家에서 나왔으며, 낭가는 삼신상제님과 환웅천황께 제사를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며 문무文武에 정진하였다. 

 

단군조선 때의 낭가

 

단군조선 초부터 소도蘇塗 옆에 경당扃堂을 세우고 미혼의 남녀 젊은이들에게 글읽기, 활쏘기, 말타기, 예절, 음악,  격투기, 검술 등을 가르쳤다. 11세 도해단군(재위 BCE1891~BCE1835) 때는 삼한 전역에 제도화되어 낭가정신의  유풍이 크게 성하였다. 

 

도해단군 때 기록을 보면,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찾아 國仙의 소도를 설치하게 하셨다”  라고 하였다.  또 13세  흘달단군 20년(BCE 1763)에  “미혼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여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머리에 천지화天地花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이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라고 하였다.

 

고조선의 경당, 고구려의 경당

 

  [구당서]<동이전>‘고구려 조’에는 고구려 때 사학인 경당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俗愛書籍 至於衡門厮養之家 各於街衢造大屋 謂之商堂 子弟未婚之前, 晝夜於此讀書習射.

   

고구려의 습속은 나무 심부름하는 미천한 집안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좋아하여, 거리마다 경당이라 부르는  큰 집을 지어놓고 미혼자제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밤낮으로 익히게 하고 있다. 경당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다.

 

 

낭가제도의 맥과 정신

  

이와 같은 한민족 고유의 신교 낭가제도의 기원은 환국시대로부터 비롯하여  →  배달의 제세핵랑濟世核郞 → 고조 선의 국자랑國子郞  →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仙人 →  백제의 무절武節(정명악 주장),  신라의 화랑花郞  →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서긍의 <고려도경>) 또는 선랑仙郞,  국선國仙으로 계승되어 왔으며, 윤관의 9성 정벌 때는 항마군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낭도들은 수려한 산천을 찾아 단체 생활을 하면서  단결력과 무사정신을 길렀으며,  정서와 도덕을 함양하였다. 또 한 무술, 기마술, 궁술 등을 익혀 용맹한 전사로서 국가에 충성하였다.  조의선인이나 화랑은 신교라는 종교정신으 로 무장한 군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도는 낭도의 모임처였고, 낭도는 소도의 무사였다.  

 

단기2095(BCE 239)년에 북부여를 건국한 국자랑 출신 해모수가 천왕랑이라는 낭가를 편성하였으며, 이것은 다시  신라의 화랑제도로 이어졌다.  그 뒤로 명맥이 쇠잔하였으나  그 정신만은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조선시대 선비의 저항정신, 구한말의 항일 구국운동과 3.1운동 등으로 민족의 위기 때마다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일본의 낭가사상

  

이러한 낭가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무사도를 만들었다. 일본의 무사도는 중세에 와서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그들 이름에 랑郞 자를 붙이는 경우가 나타났다. 낭은 화랑도에서 따온 글자이다. 즉 화랑은 죽지랑, 처용랑, 미 이랑, 장춘랑 등과 같이 이름에 ‘랑’ 자를 붙여 쓴 것이다. 

  

또한 일본인은 의인, 열사, 협객 등의 설화로서 무사도 정신을 고취하는 것을 낭화절浪花節(나이와부시)이라 했다.  낭화는 화랑을 거꾸로 쓴 것이다.  일본의 무사도는 바로 조선 신교의 낭가정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본 근대화의  문을 연 메이지 유신도 무사도 정신이 그 원동력이었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217~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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