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예술문화

한민족의 노래 세계의 아리랑

조선인에게는 쌀과 같은 아리랑

아리랑 공연 장면

 

아리랑은 한국은 물론 해외 한민족 사회에서 널리 애창되는 민요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후렴과 사설로 이루어져 있는 형태의 노래로서, 특정 지역과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각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아리랑의 기원과 발생지를 명확하게 추적하기는 쉽지 않지만, 아리랑은 태백산맥 주변 지역에서 불리기 시작해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강원도 정선, 전라남도 진도, 경상남도 밀양 등지에서는 각 지역적 특징을 반영한 특유의 아리랑으로 남아 오늘에 전하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역사 기록으로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된 노동자들에 의해 불렸다는 내용이 전한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1900)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놓고 배우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곡은 ‘아리랑타령’이라고 했다. 이 타령이란 말은 곡조를 길게 빼는 것을 세속에서 일컫는 말이다. 민영주는 배우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타령만 전담하고 있으면서 그 우열을 논하여....금·은으로 상을 주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고종 임금도 ‘아리랑’을 즐겨들었으며, 당시에도 우열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아리랑이 불렸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영문가사와 서양음계로 채보하여 수록한 악보. 1896년 잡지 <Korea Repository>에 [KoreaVocal music]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제공: 정선아리랑연구소)

한편, 1896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Hulbert:1863~1949)는 <Korea Repository>라는 잡지에 [Korea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아리랑을 영문 가사와 서양음계로 채보하여 수록하였다. 헐버트 선교사는 아리랑이 1883년부터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으며, 제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후렴은 변하지 않고 쓰인다는 해설과 함께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쌀이다’라고 하였다. 또,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이 아리랑을 들을 수 있고, 격정적으로 유행을 타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불릴 노래라는 말도 덧붙였다

식민지 조선의 영화 <아리랑>

[아리랑] 포스터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에 의해 제작된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다. 영화 <아리랑>은 1926년 4월과 6월 사이에 서울 안암동에서 촬영이 시작되었으며, 그 해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첫 상영이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되던 1926년은 여러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1926년 4월 25일에 서거하였다. 나운규를 비롯한 영화 스텝들이 서울 안암동에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하던 시점과 묘하게 겹쳤다. 아마도 나운규와 그의 스텝들은 영화 촬영 중에, 또는 그 직전에 순종황제의 서거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순종 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6·10만세운동), 이를 주도한 이들 중에는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들과 같이 농촌에서 상경한 유학생들도 많았다. 영화 <아리랑>이 첫 상영을 하던 날에는 경복궁 흥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의 건물을 완공하고 나서 이를 축하하는 낙성식이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이렇게, 영화 <아리랑>은 1926년의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제작, 상영된 것이다.

아리랑 상영예고 (동아일보 1926.9.19)

한편, 나운규는 <아리랑>을 제작할 때 ‘할리우드식의 빠른 전개와 유머를 도입하여 관객이 지루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상업적 요소와 더불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자화상이 함께 그려졌기에 영화 <아리랑>은 상업적으로도 크게 흥행을 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한반도 전역에서 순회상영을 통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간도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상영되었다. 이는 결국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 노래가 한반도에서 일본, 만주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꽃씨처럼 퍼져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영화 <아리랑>은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변사()에 의해서 대사가 전달되었으며, 배경음악은 단성사 악단에 의해서 실황으로 연주되었다. 이 때 극장에서는 바이올린으로 아리랑을 연주하였다. 한민족의 감성이 녹아있는 음악으로 상징되는 아리랑이 국악기가 아닌 바이올린으로 연주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흥미롭다. 이 시기에 재정리된 아리랑이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선율로 재탄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성공 이후에 노래 아리랑은 한국인들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식민지 체제 하에서의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일본, 만주 등 타향살이의 서러움 속에서도, 심지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아픔까지도 달래주며 그들과 함께한 것은 바로 아리랑이었다. 그래서 머나먼 땅으로 이주한 한국인 1세대들은 한국어는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어도 어쩌다 들리는 아리랑 선율에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민족 통합의 아이콘, 인류무형유산으로서의 아리랑

이와 함께 아리랑은 한국인들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노래이기도 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남북한이 공동입장을 할 때 사용되었던 노래가 아리랑이었고,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빠르고 강한 리듬의 아리랑은 전 국민을 단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2002년 월드컵때에는 아리랑이 응원가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리랑이 2012년에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민족의 문화유산을 넘어서 인류의 무형유산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각 민족과 국가, 사회공동체가 전승하고 있는 노래가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아리랑은 한민족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선율과 감성을 가졌다는 장점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심사장면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아리랑 공연중인 장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민간의 노래였지만,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 음악, 나아가 이제는 국민 대통합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하지만 아리랑은 원래 그러하였듯이 이 땅의 소박한 서민들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이 ‘누구의 것이다’라는 것보다 ‘아리랑’ 그 자체가 우리가 이 시대에 맞게 향유하고 즐길 줄 아는 그런 문화라는 인식, 그러한 가치의 발견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한국인이 있기에 아리랑이 있기도 하지만, 아리랑이 있기에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은 아닐까?

아리랑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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