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역사문화 기본학습

환단고기 전수과정

대한K화랑 0 166

1)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와 스승 이기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 사서를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평안도 선천 출신인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이다. 자신의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책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다.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그의 스승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다.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는 전라도 만경 출생으로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그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태백일사』를 쓴 이맥(이암의 현손)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기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역사서를 읽었고, 우리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계연수에게 전해 준 『태백일사』도 집안의 가보家寶로 전해 오던 것임이 분명하다.


이기는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 1910)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라 불릴 만Å 문장이 뛰어났다.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대학자이기도 하였던 그는 평생을 항일 구국운동에 바치고 1909년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絶食하여 62년의 일생을 마쳤다.


계연수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Å 기억력이 뛰어났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고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다.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이맥의 『태백일사』 등을 간행하였고, 1911년에는 스승 이기가 생전에 감수한 『환단고기』를 드디어 세상에 내놓았다. 1915년에는 만주 관전현에 배달의숙倍達義塾을 열이 역사를 가르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후 역사 회복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던 계연수는, 조선인의 민족혼 말살과 역사 파괴에 혈안이 된 일제가 검거할 제1순위 대상이었다. 결국 계연수는 1920년(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3,000여 권에 달하는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 버렸다.

2) 『환단고기』를 대중화시킨 이유립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계연수의 토막난 시신이 수습될 때, 그 광경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14세 소년이 있었다. 바로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岦(1907~1986)이었다. 이유립은 계연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릴 뻔했던 『환단고기』를 굳게 지켜 오늘의 한국 사회에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이다.


이암과 이맥의 후손인 이유립은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집李觀楫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립은 13세 때(1919) 배달의숙에 들어가 부친과 친했던 계연수를 비롯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역사 강의를 듣고 『환단고기』를 공부하였다. 이듬해에는 소년통신원으로 독립군 사이의 통신 연락을 도왔고, 24세(1930) 때는 해학 이기의 신교육의 뜻을 이어받아 잡지 <삼육三育>을 발행하며 일제의 역사 왜곡을 널리 알렸다. 광복 후에는 지난 1909년에 이기, 나철 등이 창립한 단학회檀學會의 기관지 <태극>의 주간主幹으로 활동하며 신탁통치 반대론을 펼쳤다.


그러나 여의치 않은 활동 여건 때문에 월남을 선택한 이유립은 우여곡절 끝에 1948년 추석 바로 다음 날에 삼팔선을 넘었다. 그 후 북한을 두어 차례 다녀왔는데, 이때 『환단고기』를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립이 남하한 직후, 한문과 역사에 해박한 그에게 여러 사람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형기吳炯基이다. 남하한 바로 다음 해인 1949년에 오형기는 이유립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을 빌려 가서 필사하였다.


이유립은 1963년(57세)에 대전 은행동에 정착하여 그해 11월 단학회를 단단학회檀檀學會로 개칭한 이후에는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와 강연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박창암朴蒼巖과 연결되어 1976년(70세)부터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자유>의 절반을 자신의 글로 채우며 『환단고기』가 전하는 우리 역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1976년은 이유립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박창암의 배려로 의정부로 올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백내장 수술을 받기 위해 5일간 집을 비운 사이에,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로 알고 밀린 집세 대신으로 이유립의 책을 모두 팔아 버린 것이다. 이때 자신의 생명만Å 소중히 여기던 『환단고기』 초간본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오형기 필사본이 있었기에 『환단고기』 전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환단고기』 대중화의 계기는 예상치 못한 사건에서 일어났다. 이유립의 젊은 문하생 조병윤趙炳允이 1979년, 서울의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에서 역시 이유립의 문하생인 오형기가 임의로 발문을 붙인 필사본을 영인하여 100부를 출판한 것이다. 이른바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허락도 없이 시중에 배포되었다. 이에 이유립은 사태 수습 차원에서 문제의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은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었다. 원고는 1979년 그해에 완료되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1983년에야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100부를 발간하였다. 이유립의 나이 77세가 되던 해였다. 이렇게 하여 평생 지키고 외쳐 온 『환단고기』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에 공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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